아이디가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비밀번호가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13 |
[역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1
황영희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8-1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13 |
[역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1
황영희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8-1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과학적 증거로 찾아낸 한국사 통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THE HAN HISTORY DISCOVERED FROM THE SCIENTIFIC EVIDENCES)는 분자생물학·고고학·언어학·천문학 등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재해석한 한국사 통사다. 과학적 증거는 왜곡이 어렵다는 특성상,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가치가 아니라,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과학적 증거가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삼국시대의 일식기록은 중국의 일식기록과 대부분 일치한다. 오기가 분명한, 일어나지 않은 일식까지 같은 날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식관측지가 중국대륙인 한국 역대 왕조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한 쪽이 베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한국은 누구나 관측 가능한 일식기록 말고도 전문가만이 관측할 수 있는 오행성결집, 태백주현 등도 독자기록으로 남겼고, 게다가 중국의 일식기록이 비정상적이라는, 절대 실측이 아니라는 증거는 수두룩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한국은 중국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중국대륙에도 있었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의 진실성은 한단고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 일식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조선시대의 일식기록 역시 중국대륙에서 관측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765년 2월 10일 일식이 문헌에 기원전 765년 4월로 기록된 것은 이 당시의 연초가 오늘날의 10월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왜곡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랑케도 실증사학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랑케의 실증사학은 엄밀히 말해 ‘실증’이 아니며, 일본의 예에서 보듯 역사왜곡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역사왜곡을 끝낸 일본은 수십만 권의 한국 역사책을 분서한 뒤 “사실(史實)의 고증자료 없이는 한 줄의 역사도 기술할 수 없다”며 독일인 사학자까지 동원하여 실증사학 운운했다. 랑케는 먼저 역사왜곡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진정한 실증사학이라면, 과학적 방법만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에 의해서 역사기록을 검증해야 한다.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의 가치는 과학적 증거를 분석한 데 있다. 과학적 증거는 여타 문헌기록과 등가의 가치를 가지거나 하위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과학적 증거에 위배되는 문헌기록은 거짓이다.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제목에서 보듯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문헌해석했다. |
12 |
[역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2
황영희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8-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12 |
[역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2
황영희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8-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과학적 증거로 찾아낸 한국사 통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THE HAN HISTORY DISCOVERED FROM THE SCIENTIFIC EVIDENCES)는 분자생물학·고고학·언어학·천문학 등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재해석한 한국사 통사다. 과학적 증거는 왜곡이 어렵다는 특성상,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가치가 아니라,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과학적 증거가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삼국시대의 일식기록은 중국의 일식기록과 대부분 일치한다. 오기가 분명한, 일어나지 않은 일식까지 같은 날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식관측지가 중국대륙인 한국 역대 왕조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한 쪽이 베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한국은 누구나 관측 가능한 일식기록 말고도 전문가만이 관측할 수 있는 오행성결집, 태백주현 등도 독자기록으로 남겼고, 게다가 중국의 일식기록이 비정상적이라는, 절대 실측이 아니라는 증거는 수두룩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한국은 중국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중국대륙에도 있었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의 진실성은 한단고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 일식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조선시대의 일식기록 역시 중국대륙에서 관측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765년 2월 10일 일식이 문헌에 기원전 765년 4월로 기록된 것은 이 당시의 연초가 오늘날의 10월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왜곡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랑케도 실증사학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랑케의 실증사학은 엄밀히 말해 ‘실증’이 아니며, 일본의 예에서 보듯 역사왜곡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역사왜곡을 끝낸 일본은 수십만 권의 한국 역사책을 분서한 뒤 “사실(史實)의 고증자료 없이는 한 줄의 역사도 기술할 수 없다”며 독일인 사학자까지 동원하여 실증사학 운운했다. 랑케는 먼저 역사왜곡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진정한 실증사학이라면, 과학적 방법만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에 의해서 역사기록을 검증해야 한다.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의 가치는 과학적 증거를 분석한 데 있다. 과학적 증거는 여타 문헌기록과 등가의 가치를 가지거나 하위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과학적 증거에 위배되는 문헌기록은 거짓이다.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제목에서 보듯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문헌해석했다. |
11 |
[역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3 (완결)
황영희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8-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11 |
[역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3 (완결)
황영희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8-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과학적 증거로 찾아낸 한국사 통사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THE HAN HISTORY DISCOVERED FROM THE SCIENTIFIC EVIDENCES)는 분자생물학·고고학·언어학·천문학 등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재해석한 한국사 통사다. 과학적 증거는 왜곡이 어렵다는 특성상,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가치가 아니라, 우선하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과학적 증거가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삼국시대의 일식기록은 중국의 일식기록과 대부분 일치한다. 오기가 분명한, 일어나지 않은 일식까지 같은 날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식관측지가 중국대륙인 한국 역대 왕조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한 쪽이 베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한국은 누구나 관측 가능한 일식기록 말고도 전문가만이 관측할 수 있는 오행성결집, 태백주현 등도 독자기록으로 남겼고, 게다가 중국의 일식기록이 비정상적이라는, 절대 실측이 아니라는 증거는 수두룩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한국은 중국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중국대륙에도 있었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의 진실성은 한단고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 일식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조선시대의 일식기록 역시 중국대륙에서 관측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765년 2월 10일 일식이 문헌에 기원전 765년 4월로 기록된 것은 이 당시의 연초가 오늘날의 10월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왜곡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랑케도 실증사학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랑케의 실증사학은 엄밀히 말해 ‘실증’이 아니며, 일본의 예에서 보듯 역사왜곡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역사왜곡을 끝낸 일본은 수십만 권의 한국 역사책을 분서한 뒤 “사실(史實)의 고증자료 없이는 한 줄의 역사도 기술할 수 없다”며 독일인 사학자까지 동원하여 실증사학 운운했다. 랑케는 먼저 역사왜곡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진정한 실증사학이라면, 과학적 방법만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에 의해서 역사기록을 검증해야 한다.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의 가치는 과학적 증거를 분석한 데 있다. 과학적 증거는 여타 문헌기록과 등가의 가치를 가지거나 하위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과학적 증거에 위배되는 문헌기록은 거짓이다.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제목에서 보듯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문헌해석했다. |
10 |
[역사] 나는 불온한 선비다
이종호 | 역사의아침 | 2012-07-2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10 |
[역사] 나는 불온한 선비다
이종호 | 역사의아침 | 2012-07-2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역사가 외면한 과거, 새로운 의미 찾기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의 즐거움! 지금의 우리가 읽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임과 동시에 누군가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흔적이다. 그렇게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사실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아 후세에 전한다. 이에 <틈새 한국사>는 그 동안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기록들을 찾고자 한다. 그 기록들은 ‘인물’일 수 있으며, ‘문화’나 ‘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간과한 과거의 기록들이 이 시리즈에서 의미를 가진 또 하나의 역사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대의 주류와 다른 삶을 산 조선의 문제적 인물, 9인을 말하다 이 책은, 조선을 지배한 사상적·정치적 경향과는 다소 비켜서 있는, 그래서 동시대를 함께한 ‘주류’와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며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아홉 명의 사상가를 이야기한다. ‘광인’ 김시습, ‘비범한 보통인’ 서경덕, ‘반주자학자’ 박세당, ‘양명학자’ 정제두, ‘시골 서생’ 이익, ‘과학사상가’ 홍대용, ‘천주교인’ 이벽, ‘역사에서 사라진’ 유수원, ‘경험주의자’ 최한기가 바로 그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들의 남다른 일생과 사상, 그리고 사회인식 등을 조망함과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이 살다 간 당대의 조선을 살피고자 한다. 더불어 그들의 삶과 사상이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한다.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 개혁 요구 오랜 동안 고착된 제도(혹은 관념 등)들 중에는 시대가 지나면서 보완할 필요가 있거나, 혹은 시대의 요구와 흐름에 맞게 아예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까닭에 사회 구성원들의 다수가 그 문제점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지만 그것을 개혁하거나 개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불편한 ‘지금의 현실’, 그리고 고착되어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이 작용하는 제도 등을 개선하고자 하는 개인과 사회의 노력은, 형태나 방법 그리고 결과는 다르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역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한국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유수원, 이익, 홍대용 등은 서로 다른 시대(이익과 유수원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공통적으로 현실의 폐단을 비판하고,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 개혁과 사회의 보편적 인식 변화 등을 요구한다. 때로는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이들의 관념과 주장 등을 통해 저자는 당시 조선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함께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성리학 중심의 관념에 도전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한 두 기둥은 국왕과 양반 중심의 신분제와, 사상 및 철학의 근간이 된 성리학이었다. 특히 성리학은 학문이기 이전에 구성원들의 보편적 인식은 물론 그들의 사고와 행동 등 일상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지배한 규범이자 철학이며 종교적 도그마였던 까닭에, 신분제와는 달리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또한 조선의 기득권을 유지한 양반들에게 성리학의 부정은 곧 자신들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성리학에 대한 논의는 학문적인 관점, 철학적인 관점에서만 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대부들이 성리학만을 절대지표로 삼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반주자학의 길을 간 박세당이나, 성리학과 다른 양명학을 공부하고 교육시킨 정제두, 그리고 유학 자체를 부정하고 그 자리를 천주교로 대체하려 한 이벽 등의 삶과 사상 등을 통해 성리학이 거의 모든 것이었던 시대에 성리학을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것을 모색한 조선 지식인의 한 부류를 살핀다. 완벽할 수 없는 그들의 사상과 삶 시대의 주류에서 다소 비켜 서 있는 아홉 명의 인물을 소개하는 이 책은 그들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미화하거나 혹은 그들을 순교자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대의 주류와 분명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사상이나 주장 속에서 보이는 한계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유수원은 양반에게 과세, 신분 차별이 없는 과거제도 실시 등을 주장했지만 서얼 차별 금지와 같은 신분제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으며 놀고먹는 양반들의 농업 종사와 노비제 폐지, 과거제 개선을 주장한 이익은 입신이 쉽지 않은 몰락한 남인가(家)의 인물임을 환기시킨다. 또한 평생을 주유천하하며 지낸 김시습이나 개경의 화담가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생활한 서경덕의 경우 그들이 ‘관직’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 아니라 출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독자들은 역사 속에 정형화되고 박제가 된 모습이 아닌 조금은 인간다운 그들의 실체에 좀더 내밀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9 |
[역사] 동학 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이윤섭 | 이북스펍 | 2012-10-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9 |
[역사] 동학 농민운동과 청일전쟁
이윤섭 | 이북스펍 | 2012-10-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사람답게 살고 싶어 일어난, 평등을 꿈꾸던 후한말 농민들의 동학운동.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 외세에 놀아난 지도자들과는 달리 민초들은 외세에 굴하지 않고 대항했다. 이제 후한말 세상으로 독자들을 안내해 보겠습니다. 동학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입니다. 조선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로, 반봉건, 반외세를 부르짖은 운동입니다.동학농민저쟁은 동학이라는 종교조직으로 이전 민란과는 많은 부분에서 성격이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것도 다릅니다. 아쉽게 실패로 끝났지만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우리 민초들의 삶은 의연했습니다. |
8 |
[역사] 삼국왕조야록
손영목 | 도서출판오늘 | 2010-08-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8 |
[역사] 삼국왕조야록
손영목 | 도서출판오늘 | 2010-08-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이 책은 중견 작가 손영목 씨가 편저한 삼국왕조야록으로 삼국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야사 부분을 간추려 정리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조선왕조야록]을 비롯하여 [고려왕조야록]과 함께 도서출판 오늘이 97년부터 3년 여에 걸쳐 기획한 것으로 우리 나라 역사 속의 중요한 야사를 정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정확한 것과 완벽한 것을 요구하는 현대인의 삶에 우리 역사를 한 발 비켜서서 바라보는 여유와 그 속에 있는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 속에 오히려 우리 민족의 정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편저자 손영목 씨는 머리말에서, '역사에서 정사가 뼈대라면 야사는 살과 같다. 정사가 정권 담당자 입장에서 자기본위적으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면, 야사는 그 정사의 행간에서 제외되거나 누락된 이야기를 객관화한, 훨씬 인간의 냄새와 감칠맛이 풍부한 기록이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해석은 정사를 기본으로 하되 그와 관련된 야사를 함께 비교 분석하는 노력에서 가능해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단순한 재미있는 야담 차원을 넘어, 역사의 중요 단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면서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일화를 시대순으로 배열함으로써 역사의 딱딱한 문을 열어젖히고 독자들을 끌어들여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한 단계 높여 주는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은 1. 건국의 장엄한 서사시, 2. 대륙을 향한 웅지, 3. 서라벌의 혼, 4. 삼국시대의 사랑과 낭만 5. 한을 극복하는 지혜 등 5장으로 나눠져 있으며 '하늘의 아들 동명왕', '소서노 부인과 온조 형제','고구려 남아의 기상 해명태자', '사연도 기구한 미천왕', '연개소문의 청소년 시절', '복수의 화신 명원부인', '박제상의 숭고한 충절', '최치원과 당나라 여인', '도화와 진지왕' 등 24가지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청소년에게는 우리 역사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기성세대에게는 자칫 잊어버릴 수 있는 우리 민족의 혼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7 |
[역사] 선덕여왕을 클릭하면 큰 지혜가 보인다
박순정 | 도서출판오늘 | 2010-08-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7 |
[역사] 선덕여왕을 클릭하면 큰 지혜가 보인다
박순정 | 도서출판오늘 | 2010-08-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신라 제27대)이며 16년 재위 기간 동안에 많은 치적을 쌓은 왕으로, 이 책은 선덕여왕대에 있었던 문화, 예술, 업적 등에 대한 연구서이며 특히 선덕여왕의 심성과 슬기, 지혜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제1장에는 최초의 여왕 선덕에 대해, 제2장에는 찬란한 문화유산들, 제3장에는 외침을 몰아내다, 제4장에는 뛰어난 혜안의 인재등용, 제5장에는 일화 속의 선덕여왕에 대해 쓰고 있다. 선덕여왕은 모란에 대한 일화에서부터 그가 몇 살에 여왕이 되었는지, 또는 결혼을 과연 하지 않았는지 등등 많은 이야기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 ― 분황사', '신라의 우물, 겨레의 우물 ― 석정', '우주로 향하는 마음으로 돌을 쌓다 ― 첨성대', '공덕가의 고향 ― 영묘사터'. '선덕여왕을 모시는 사찰 ― 부인사', '용이 나온 궁궐을 사찰로 바꾸다 ― 황룡사터', '호국정신의 금자탑 ― 황룡사 9층 목탑' 등 저자가 발로 뛰어다니며 힘들여 써낸 글들을 비롯하여 '여왕을 짝사랑하다', '선덕여왕은 결혼을 했을까, 안 했을까', '선덕여왕은 50살에 여왕이 되었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둘이 아니다', '신라의 가장 천진한 미소'. '탁월한 인재등용', '외교전문가 김춘추', '군사전문가 김유신', '제 아들을 죽여주십시오', '여왕에 대한 모독', '선덕여왕은 왜 도리천에 묻히고 싶어했을까' 등의 흥미 있는 글들이 쓰여 있다. |
6 |
[역사]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
KBS역사스페셜 제작팀 | 가디언 | 2012-04-2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6 |
[역사]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
KBS역사스페셜 제작팀 | 가디언 | 2012-04-2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변화한 섞임의 결과가 우리 역사다.” 교류의 흔적을 찾아가면 역사의 퍼즐이 맞춰진다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일본의 지진으로 우리의 삶이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이슈가 생겨나고 그 결과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듯, 과거의 어느 시점에도 이러한 현상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국경도 명확하지 않던 시대에 역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 안에서 만들어진 기록이라 말하는 것은 단선적인 사고다. 이번에 출간된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는 ‘역사는 소통의 기록’이라는 관점으로 기획된 ‘KBS 역사스페셜’을 재구성해 독자들에게 마치 역사의 퍼즐을 맞추어가는 것 같은 재미와 흥미를 준다. 1장에서는 ‘섞임과 교류가 역사를 만든다’는 내용으로 신라 왕족이 된 흉노족, 금나라 황족의 성이 애신각라인 까닭 등 영토적 개념이 아닌 자유로운 왕래를 통해 이루어진 역사를 추적한다. 2장에서는 ‘동북아 문화의 용광로, 한반도’로 동인도회사에서 코리아 호를 건조하고, 동로마의 황금보검이 경주에서 발굴된 것 등을 조명하여 한반도에 다양한 문화가 들어와 미친 영향을 발굴하고 있다. 3장은 ‘패자의 또 다른 행보, 메신저가 되다’로 신라나 근기국 등 멸망한 국가들의 후예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여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역동적인 모습들을 철저한 고증과 현지답사를 통해 생생하게 복원한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고, 엄청난 이야기들로 가득 찬 스토리텔링의 보고이기도 하다. 공동체가 함께 공유해야 할 기억이기도 하고, 집단의 정체성을 공급해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웃들과의 교류의 기록도 한자리쯤은 차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민족들과의 대립과 투쟁이 아닌 이해와 소통의 사건이 왜 없었겠는가?”라고 말하는 역사스페셜 장영주 책임프로듀서의 말처럼 역사는 투쟁일 뿐 아니라 소통과 이해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주제이자, 앞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다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시발점이다. 역사의 올바른 사용법은 소통을 통한 공존의 기술을 익히는 것 일본의 신(神)이 된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가 팽창할 시기에 복속된 사로국의 귀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신라가 패망한 후 북쪽으로 가 새로운 신세계를 구축한 사람들, 동로마 양식의 황금보검이 신라에서 출토된 것도 모두 소통과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때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가지고 간 것은 비단 인적 자원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기존에 사용하던 농기구와 생활양식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향으로 전투에 말을 사용하지 않던 일본에서는 기마전투술이 보급되었고,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이예를 통해서는 조선술이 발달하였다. 또 북방 민족의 영향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국가의 체제를 정비했던 내물왕까지 우리 역사는 멀게는 사마르칸트부터, 가깝게는 일본까지 거리를 불문하고 교류하고 소통해왔다.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는 제대로 교류하고 소통했을 때 어떤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되는지를 역사적으로 밝혀내고자 한다. 고여 있는 물이 썩기 마련이듯이 역사 또한 다양한 방향으로 흐르고 섞였을 때 비로소 새로움을 창출하여 풍성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떤 종족이나 집단도 모든 문화를 자체 생산할 수 없다. 어떤 공동체가 외부의 위협과 침략에 대응하는 과정이 역사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립과 투쟁만이 역사라고 단정하는 것 또한 역사에 대한 편협한 시각일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북공정’이나 일본이 쉼 없이 주장하고 있는 ‘독도’ 영유권 주장이 오늘날의 역사를 대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소통과 교류적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것은 역사 그 자체를 더 잘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보다 올바로 사용하여 과거와 현재를 더 잘 살아가기 위함이다. 이 땅에 터를 닦은 다양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하다 《우리 역사, 세계와 통하다》는 영토적 개념의 역사가 아닌 민족 이동으로 인해 교류하고 소통한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이에 대해 신복룡 건국대 정치외교학 석좌교수는 “다민족 사회가 분쟁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민족 혼혈인들이 자기만의 특수한 사회를 형성한 다음 분리주의를 요구하거나 기존에 존재했던 민족들이 그 분리를 주장하는 이민족들을 박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미 수많은 혼혈이 융화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주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은 “순수 단일민족은 없다”고 설명한다. 모든 민족은 다 혼혈이고 혼합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더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피가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단일민족이란 혈통의 단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정신적 요소에서의 단일화, 일체화와 동질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와 이 땅에 터전을 잡고 대대손손 이어온 사람들과 이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다른 나라에서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역사까지 포함해 그들이 어떻게 세계와 만났으며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발견해내고 있다. |
5 |
[역사] 일제시기 참정권 문제와 조선인
마츠다 도시히코 | 국학자료원 | 2012-05-2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5 |
[역사] 일제시기 참정권 문제와 조선인
마츠다 도시히코 | 국학자료원 | 2012-05-2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일제시기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문제 연구서. 조선반도와 일본 본토 지역에 대한 일본제국의 참정권제도의 실태와 그 구조 속에 사람들의 활동상 등을 중점적으로 수록했다.
|
4 |
[역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윤섭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9-2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4 |
[역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윤섭 | 북큐브네트웍스 | 2011-09-2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우리 역사를 바꾼 큰 줄기이자 희대의 영웅을 탄생 시킨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역동적이고 스펙타클한 역사의 현장을 이야기합니다. |
3 |
[역사] 조선은 뇌물천하였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2-03-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3 |
[역사] 조선은 뇌물천하였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2-03-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조선시대 관료들의 뇌물수수는 임금 세종도 막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통해 현 정치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 왕조가 바뀌어도 뇌물 풍조는 계속되었다 - 대신들의 뇌물수수는 임금 세종도 막지 못했다 - 중앙 요직에 앉아서도 마음은 뇌물 밭에 …… - 노비마저도 상전에게서 배운 것은 뇌물수수였다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통해 현 정치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현재 대한민국은 공직사회를 비롯하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뇌물수수 및 공여 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근래에 발생한 부산 저축은행 사태, 대통령 친인측의 청탁비리, 공무원들의 뇌물수수, 스포츠계의 승부조작 등은 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이런 뇌물수수와 청탁비리 등으로 인한 정치사회의 부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만큼 부정한 청탁과 뇌물수수 및 뇌물제공이 공공연하게 만연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뇌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임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 초기(태조~성종)에 만연했던 뇌물수수 사건들을 통해서,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에도 변함없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뇌물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지금도 청탁이나 뇌물 제공 등으로 부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들이 이 책을 읽고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책의 집필 의도가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중앙 권력자부터 노비까지 뿌리박힌 뇌물수수 관행 우리가 집중적으로 조명할 조선 초기(태조~성종)에는 뇌물이 공공연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뇌물 풍조가 만연하였다. 위로는 중앙의 권력자들인 정승 · 판서 · 참판으로부터 아래로는 내시와 아전에 이르기까지 뇌물을 받아 챙겼다. 심지어는 노비조차도 뇌물을 받았다. 또한 지방에서는 관찰사나 수령들이 집중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관찰사는 수령들에게서 뇌물을 받았고, 수령들은 상인이나 백성들에게서 뇌물을 거둬들였다. 문관만이 아니라 무관들도 뇌물을 받았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들이 상인들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며, 후궁이나 임금의 유모 중에도 이것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범죄자를 다스리는 포졸과 곤장을 치는 나장들까지도 뇌물을 받는 실정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최하급관리라고 할 수 있는 아전들은 선상노비選上奴婢 선정, 공물 수납, 부역 부과 등과 관련하여 뇌물을 챙겼다. 그밖에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사신들이 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많다 보니 이와 관련된 무고나 탄핵이 난무하여 깨끗한 사람들이 애꿎은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을까? 당시에는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집중적으로 뇌물을 바쳤다. 관찰사들은 중앙의 권세가들에게 줄을 대어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 뇌물을 주었고, 수령들도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며, 자신들의 고과성적을 매기는 관찰사들에게도 뇌물을 바쳤다. 그 밖에도 죄수 · 상인 등이 뇌물을 제공했고, 특히 외교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본인들과 귀순하려는 여진족이 조선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도 있었다. 사회 전반이 이렇다 보니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뇌물을 전달하는 뇌물 브로커나 소송이나 고소를 업으로 삼는 자들까지도 있었다. 그들은 왜 뇌물을 주었을까? 우선 인사청탁을 위해서 이조 판서나 재상 등에게 뇌물을 바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은 요즈음처럼 군대 징집을 면제받으려고 하거나, 세금 감면, 형벌 감형, 재판 승소 등을 위해서 뇌물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뇌물의 액수에 따라 뇌물을 받은 본인은 최고 사형, 중노동을 시키는 도형徒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던 장형杖刑, 작은 매로 볼기를 치는 태형笞刑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죄인의 얼굴이나 팔뚝에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자자형刺字刑을 가할 수도 있었다. 뇌물을 주거나 받은 본인만이 아니라 그 자손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요직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았다. 또한 뇌물을 받은 자와 함께 뇌물을 준 자도 아울러 처벌하게 되어 있었고, 뇌물을 주거나 받은 자를 천거한 사람도 벌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뇌물과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나 중신들의 경우 불문에 부쳐지거나 경미한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처벌이 미온적이다 보니 뇌물비리가 만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조선을 뒤흔든 뇌물 사건들 - 임금이 지시한 뇌물금지 및 처벌법을 우습게 안 대신들 세종 6년(1424) 7월에 임금은 대신이나 조정 관리 중에 뇌물을 받는 자가 많아 이를 엄하게 금지하는 법과 뇌물을 받은 자와 준 자를 처벌하는 법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영의정 유정현은 “나 같은 늙은 자가 음식물을 받는 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겠소.”라고 했으며, 대제학 변계량과 이조 판서 허조도 이에 동조하여 “먹는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하필 금할 것이 있겠소.(《세종실록》권25, 6년 7월 14일 정해)”라고 말했다. 이렇듯 당시에도 대신들은 뇌물에 대한 인식이 아주 흐릿했다. - 임금 세종의 조말생 뇌물 무마 사건 장원급제자로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은 대제학 조말생. 하지만 그의 뇌물 연류는 조선 천하가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병조판서를 재직할 때에는 뇌물을 받고 소송 판결을 지연했고, 토지를 받고 관등을 올려준 부당한 인사 사건 등을 저질렀다. 충신들은 그를 죽어도 그의 죄가 남을 법하다며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 세종은 그를 선왕 태종이 총애했던 인물로 공로가 있다하여 귀양을 보는 걸로 뇌물 사건을 무마했다. - 신숙주의 아들 신정, 뇌물 대가로 사약을 받은 사건 세조의 공신 훈구파의 신숙주. 그의 아들 신정은 탐욕스럽기가 끝이 없었다 한다. 신숙주는 입버릇처럼 “우리 집을 패망시킬 자는 반드시 이 자식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과거시험에서도 친구 양수사의 답안을 베껴 썼다. 하지만 세조는 그가 신숙주의 아들임을 알고 합격시켰다. 결국 그는 성종 13년(1482) 4월에 뇌물을 받고 관인을 위조하여 임금을 속인 죄로 사약을 마시고 비운을 맞게 된다. - 후궁의 부친이 뇌물을 받고 권력을 휘두르다 조선 초기 태종의 후궁인 숙공궁주의 아버지 김점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직접 자기 침실 안으로 드나들게 하여 뇌물을 받았으며, 벼슬을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옥사도 봐주기도 했다. 심지어 죄수들까지 뇌물로 석방시키는 일이 허다했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를 관둘 때, 뇌물을 운반하기 위해 3번이나 이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관직에서 물러나도 받은 뇌물은 변함없이 남아 있는 법이다. 예나지금이나 공직자는 뇌물로 퇴임 후를 준비한다. - 뇌물로 군역도 면제받다 장수나 만호 등 무관들의 뇌물수수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7년(1398) 2월 경기도 관찰사 박경의 보고에 의하면,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된 무관인 만호와 천호 들이 자기가 관할하는 수군들 가운데 부유한 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정작 국경을 지킨 자들은 가난한 사람과 아이, 그리고 늙은이들뿐이었다고 한다. - 암행어사 출두도 미리 알려 피하게 했다 성종 20년(1489) 11월 사간원 헌납 윤긍 등이 암행어사를 보내어 수령들을 규찰할 것을 임금에게 청했다. 하지만 어사는 어느 지역에 들어가기도 전에 앞질러 소식이 전파되어 고을 수령에게 알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사가 데리고 다니는 서리(아전)들이 암행어사의 위엄을 빌어 권세를 빙자하여 고을 수령을 위협하여 뇌물을 낚아채는 대신, 암행어사의 출두 시점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요즘 경찰의 업소 단속 세태와 비슷하지 않은가! - 뇌물이 통하지 않았던 사람들 30여 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한결같이 청렴하기만 했던 정창손. 그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고변한 김질의 장인으로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성종 18년(1487) 1월 향년 86세로 정창손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청빈한 재상이니 부의 물품을 넉넉히 주도록 명했다. 그의 시호가 충정忠貞인데, 그가 도를 곱게 지키고 굽히지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성종 때 이조와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한 이숭원도 뇌물이 통하지 않았던 청백리였다. 그는 예조 참판 이보의 아들로서 문관에 장원급제하여, 사제감 주부에 임명되고, 바로 사간원 정언으로 전직되었다. 그후 사헌부 지평, 이조 정랑, 장례원 판결사, 좌승지, 평안도 관찰사, 이조 판서 등을 거쳤지만, 집안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
2 |
[역사] 조선의 암행어사
김영진 | 도서출판 큰방 | 2012-01-0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2 |
[역사] 조선의 암행어사
김영진 | 도서출판 큰방 | 2012-01-0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우리나라의 야담과 전설의 진면목을 담은 이야기책. 야담과 전설, 해학 등이 골고루 어우러진 재미있고 구수한 이야기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선조들의 재치와 지혜를 만날 수 있다.
|
1 |
[역사] 조선인의 세계일주
이윤섭 | 이북스펍 | 2012-10-0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
1 |
[역사] 조선인의 세계일주
이윤섭 | 이북스펍 | 2012-10-0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2-11-23) 대출:0, 예약:0, 보유수량:5 지원기기:
조선시대 사람들은 세계여행을 했을까요?
조선인 최초로 세계일주 여행을 한 민영환이 기록한 해천추범 . 당시 조선인의 세계 일주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섭 저자의 "조선인의 세계일주"가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구법(求法), 무역, 외교 등의 목적으로 해외로 나간 우리 조상이 많았다. 인도에 구법 여행을 떠난 혜초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서 여생을 마쳤다. 혜초의〈왕오천축국전〉에는 인도에 온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승려가 매우 많았음을 전한다. 고려시대에도 국제무역 등으로 외국과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엄격한 쇄국 정책을 편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 일본으로 보내는 사신 이외에는 외국 여행을 한 이가 거의 없었다(풍랑으로 중국에 표류한 이의 기록이 2개 정도 남아 있다). 1876년 일본과 새로 국교를 수립하고 1882년 이후 구미 각국과 통교한 이후 보다 넓은 세상을 볼 기회가 생겼다. 1883년 조선은 미국에 답방 사신단을 보냈는데, 이들 가운데 최초로 세계일주자가 나왔다. 1896년에는 아관파천의 뒷수습을 위해 민영환 일행을 러시아에 보내니, 이들이 두 번째로 세계일주를 한 한국인이었다. 이들의 여행을 살펴보는 것은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구한말 당시 기록은 서양인이 우리의 모습을 본것이 압도적을 많았다. 하지만 이책은 근대화 문화 수용의 충격을 몸소 경험한 우리의 눈으로 바로본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한말 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외교가 중요한 이 시점 조선인으로 세계일주를 한 민영환의 외교활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